가평읍 마장리, 봄볕이 따스하게 내리쬐는 5월 13일 아침. 나는 권옥순 어르신의 정원을 찾았다. 이곳은 매년 봄이면 사진작가들과 꽃을 사랑하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그 이유는 바로, 흔히 볼 수 없는 순백의 금낭화가 12년째 이 정원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정원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고개를 조아린 채 줄지어 피어 있는 금낭화였다. 분홍빛 금낭화는 많이 보았지만, 이렇게 하얗고 아리따운 금낭화는 이곳 밖에 없기 때문이다.
꽃송이 하나하나가 마치 조선시대 여인네들이 허리춤에 달고 다니던 비단 주머니를 닮았다. 그래서일까, 이 꽃에는 ‘금낭화’라는 이름 외에도 ‘며느리주머니’라는 정겨운 별칭이 붙었다고 한다.
순백의 금낭화는 고운 치마폭 속에 숨겨둔 작은 주머니처럼,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 모습이 어쩐지 겸손하고, 또 애틋하다. 꽃말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 꽃의 자태가 왜 늘 아래를 향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를 조용히, 묵묵히 따르는 마음이 꽃잎마다 스며 있는 듯했다.
권옥순 어르신은 “이 꽃은 해마다 정원에 피어나 내게 봄이 왔음을 알려줘요. 처음엔 분홍빛 금낭화만 알았는데, 이렇게 하얀 금낭화가 피어날 줄은 몰랐죠. 순백의 꽃을 볼 때마다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에요”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 미소에, 오랜 세월 꽃과 함께한 따뜻한 정이 묻어났다.
금낭화에는 슬픈 전설도 있다. 사랑하는 이를 기다리다 끝내 이루지 못한 여인의 눈물이 금낭화가 되었다는 이야기. 그래서인지, 금낭화의 영문 이름은 ‘Bleeding Heart’, 즉 ‘피 흘리는 마음’이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 꽃송이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틋함이 담겨 있는 듯했다.
정원 한켠에 앉아 순백의 금낭화를 바라보며,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삶도 이 꽃처럼, 때로는 고개를 숙이고, 때로는 조용히 누군가를 따르며 살아간다. 겉으로는 화려하지 않아도, 그 속에 담긴 마음과 이야기가 더 깊고 아름답다.
권옥순 어르신의 정원에서 만난 순백의 금낭화. 그 고운 자태와 전설, 그리고 “당신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꽃말은, 내 마음에도 조용한 울림을 남겼다. 봄날의 정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깊이를 배운다. 금낭화처럼, 오늘도 누군가를 조용히 따르며 살아가는 이들에게 이 꽃의 순백이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