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양태룡(인문고전연구소 경인학당 대표)
주희는 『대학』을 가리켜 “처음 배우는 사람이 덕에 들어가는 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대학』은 단순한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 배우고 어떻게 자신을 다스리며 어떠한 삶을 살 것인가를 일러주는 인생의 정교한 설계도입니다.
옛사람들은 여덟 살이 되면 먼저 『소학』을 배웠습니다. 청소하는 법, 어른을 공경하는 법, 인사하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예절을 익혔는데, 여기서 말하는 절(節)은 일상에서 지켜야 할 ‘행동의 절도’였습니다. 이어 예절과 음악, 활쏘기와 말타기, 글쓰기와 셈하기를 통해 문(文), 즉 학문과 기예의 형식을 익혔습니다. 『소학』이 일상 속에서 몸과 행동을 바로 세우는 기초 공사였다면, 『대학』은 그 바탕 위에서 삶의 큰 뜻과 방향을 세우는 집을 짓는 일과 같습니다.
『대학』이 유학의 핵심 경전으로 자리 잡은 시대적 배경은 송나라였습니다. 송나라는 문치주의를 국가 운영의 기본으로 삼아 학문과 문화를 꽃피웠으나, 지나치게 문인을 우대하고 무인을 경시한 결과 국방력이 약화되어 북송이 무너지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도탄에 빠진 시대 속에서 지식인들은 "나라를 어떻게 다시 일으킬 것인가"를 깊이 고민했습니다. 대표적 인물인 범중엄이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먼저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하라"고 외친 것은 지도자와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상징하는 명문이 되었습니다. 주희 역시 이러한 시대적 위기의식 속에서 유학의 근본을 다시 세우고자 했습니다.
『대학』의 핵심은 삼강령(三綱領)에 담겨 있습니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고, 백성을 새롭게 하며, 지극한 선에 머무는 데 있다."
인간 본래의 맑고 선한 성품을 회복하는 명명덕(明明德)이 모든 수양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나 자기수양이 개인의 만족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나의 덕을 타인과 세상으로 확장하는 신민(新民), 곧 나를 미루어 남에게 미치는 추기급인(推己及人)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명명덕과 신민이 깊어질 때 비로소 최고로 완숙한 선의 경지에 머무는 지어지선(止於至善)에 이르게 됩니다.
이러한 삼강령을 실천하는 구체적 단계가 바로 팔조목(八條目)입니다.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탐구하는 격물치지, 양심을 속이지 않는 성의, 마음의 편향을 바로잡는 정심을 거쳐 수신에 이르고, 이를 가정(제가)과 사회(치국), 세상(평천하)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특히 『대학』은 삶의 본질과 순서를 강조하며,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고 일에는 시작과 마침이 있으니 먼저 할 것과 나중 할 것을 알면 도에 가까워진다고 일깨웁니다. 성취보다 근본을 먼저 세우고, 결과보다 과정을 바로 세우는 것이 올바른 배움의 길입니다. 나아가 내가 머물러야 할 궁극의 목표를 먼저 아는 것이 마음의 고요와 안정을 얻고 깊은 통찰에 이르는 첫경험입니다. 『대학』은 높은 지도자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스스로를 닦는 수신(修身)을 근본으로 삼으라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대학』이 제시한 이 높고 곧은 삶의 목표를 현실 속에서 어떻게 지속할 것인가? 그 답을 주는 책이 바로 『중용』입니다.
『중용』은 첫머리에서 하늘이 부여한 것을 성(性)이라 하고, 그 본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 하며, 그 도를 가꾸고 다듬는 것을 교(敎)라고 정의합니다. 여기서 하늘의 명령이란 거스를 수 없는 숙명이 아니라, 각자에게 부여된 고유한 사명이자 선한 본성입니다. 교육이란 없던 길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도로 위에서 본래 가야 할 차선을 벗어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방향을 다잡아주는 작업입니다.
마라톤을 하면서 이 가르침의 진가를 깨달은 적이 있습니다. 첫 마라톤 대회 출발선에서 총성이 울리자, 마음이 앞선 나머지 선수들의 뒤를 바짝 따라 달렸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호흡이 가빠지고 다리가 무거워졌습니다. 남의 속도에 나를 맞추느라 정작 나의 페이스를 잃어버렸던 것입니다.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타인의 기준과 속도만을 좇다 보면 자기 자신의 중심을 잃게 됩니다. 『중용』의 핵심은 바로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중용은 정지된 상태의 고정된 중간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중심을 찾아가는 대단히 역동적인 과정입니다. 외줄을 타는 줄타기꾼이 몸의 기울어짐에 따라 사방으로 힘을 주며 수평을 맞추듯, 일과 삶의 균형 역시 끊임없이 중심을 재조정하며 때와 상황에 맞추어 중심을 얻는 시중(時中)의 지혜입니다. 20대의 중심과 60대의 중심이 다르고, 봄의 삶과 겨울의 삶이 다르듯 상황에 맞춰 유연하게 응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중용의 실천을 이끄는 힘은 정성과 성실함, 즉 성(誠)에 있습니다. 정성과 성실함이 쌓이면 밖으로 드러나고, 드러나면 밝아지며, 밝아지면 주변을 움직이고 마침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남이 한 번에 한다면 나는 백 번, 남이 열 번에 한다면 나는 천 번을 반복하겠다는 기천(己千)의 정신,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홀로 있는 공간에서도 삼가며 양심을 속이지 않는 신독(愼獨)의 자세가 축적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인격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살아가다 보면 아무리 지극한 정성을 다해도 결과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실패나 한계에 부딪힐 때, 『중용』은 군자는 자신이 현재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소위이행), 자신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것을 탐하거나 원망하지 않는다고 조언합니다. 통제할 수 없는 세상의 평가나 결과는 내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 임하는 태도와 흘린 땀방울은 온전히 나의 것입니다. 중용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이나 외적 결과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후회 없는 최선을 다합니다.
알프스 몽블랑을 트레킹할 때의 일입니다. 매서운 칼바람을 뚫고 그랑 콜 페레 고개 정상에 섰을 때의 풍경은 장엄하고 감격스러웠지만, 칼바람과 추위 때문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반면 산 아래 라풀리 계곡은 맑은 물과 들꽃, 지친 여행자들의 온기가 있는 따뜻한 삶의 공간이었습니다.
우리는 늘 높은 정상만을 바라보며 살아가지만, 정상에만 머물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평지에서 일상을 성실히 살아가고, 때로는 계곡으로 내려와 쉬며 사람들과 온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오를 때는 힘껏 오르고, 머물 때는 평온하게 머물며, 내려올 때는 기꺼이 내려오는 것. 정상과 평지와 계곡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때와 상황에 따라 그 사이를 조화롭게 오르내리는 삶, 그것이 몽블랑이 일러준 중용의 실천입니다.
『대학』이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고 삶의 목적지를 제시하는 경전이라면, 『중용』은 그 길을 “어떻게 걸어갈 것인가”를 가르쳐주며 내면의 중심을 잡아주는 경전입니다.
품격 있는 삶이란 평생 정상에만 머무르는 삶도, 계곡에 안주하는 삶도 아닙니다. 남의 속도가 아닌 나만의 페이스를 지키며, 오를 때는 도전하고, 평지에서는 일상을 다지며, 계곡에서는 타인과 온기를 나누는 삶입니다.
대학과 중용의 지혜를 마음에 품고, 내면의 균형 속에서 삶의 변화에 유연하게 응답하며, 날마다 성실함을 지속하는 고귀한 인생길이기를 기원합니다.
<ps>올해도 여전히 가평에는 인문고전 강의가 개설되지 않아 서울ㅇ0학습관에서 수업을 진행합니다.